12일 열릴 예정이던 남북 당국회담이 11일 수석대표 '격(格)'을 놓고 대립하다 합의에 이르지 못해 회담이 무산됐다.

2007년 5월(5.29-.6.1) 제21차 남북장관급회담 서울 개최 이후 7년만에 개최가 합의된 남북회담이 무산된 이유는 뭘까.

겉으로는 회담의 '격'을 둘러싼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현충일을 기해 지난 6일(목) 개성공단 정상화와 금강산관광 재개를 위한 북남 당국간 회담을 제의했다.
북한은 또 6.15 남북공동선언 13돌과 7.4남북공동성명 발표 41돌 공동개최도 제안했다.

북한측은 시간상 촉박한 6.15 선언기념행사 공동개최라는 시간적 촉박성을 감안해 장소와 시간 문제는 남측이 편한대로 하면 될 일이라며 남측의 결정에 맡겼다. 9~10일 1박2일에 걸친 예비실무회담도 우리 측이 제시한 판문점에서 열었다.

관례대로라면 이번 당국회담 장소는 평양으로 해야 하지만 북한은 당국회담은 물론 예비회담장소마저  남측이 요구대로 따르는 통큰 양보를 한 것이다.

북측이 당국간 대화제의를 하던 날 일부에서는 "북한의 유례없는 저자세 왜?"(국민일보)라고까지 표현까지 나왔다.

북한의 양보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북한은 지난 5월27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은 "개성공업지구(개성공단) 정상화를 위한 우리 정부의 대화제의를 사실상 수용하겠다"고 했다. 북측이 개성공단 문제를 입주기업인과 협의하겠다고 하자 정부가 기업인의 방북을 신변안전 문제를 들어 불허하자 "남측 당국자의 동행도 허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당국간 실무회담이 먼저"라며 북측의 성의를 단번에 거절했다. 개성공단 폐쇄 이후 일관된 정부의 요구사항이었다.

북측의 양보는 6.15 남북공동선언과 7.4남북공동성명 공동개최 제안에서도 확인된다. 정부를 배제했던 6.15 선언공동기념행사에서도 정부참여를 제안해 통민봉관에서 한발 물러선 것.

북한은 김정은 노동당제1위원장의 최룡해 특사(인민군 총정치국장)가 "중국의 건의를 받아들여 관련국과 대화를 발전시키기를 원한다"고 밝힌 이후 이어진 조치다.

남북당국회담에 이어 북한과 미국간 회담으로 이어지고 6자회담으로 연결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북한측의 전향적 제안은 박근혜 정부가 대북정책인 '한반도프로세스'를 위해 북한 핵 포기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대화가능성을 열어놓은데 따른 성과라는 평가(한겨레)까지 나왔다.

그러나 12~13일 남북당국회담은 끝내 무산됐다.
앞서 미중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북한핵실험 불용과 북한 핵보유국 불인정을 미중관계의 핵심과제로 강조했다.
남북 당국회담에 의제로 북한핵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은 북중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를 부각했다.
한반도 문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미국이 북핵 문제를 집중거론하면서 우리 정부에도 한미공조, 한미동맹을 중요시하는 박근혜 정부의 운신폭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남북당국회담 개최 합의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정부 때와 달리 박근혜 정부들어서는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러브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금강산 박왕자씨 사건 이후 파탄난 남북관계를 박근혜 정부에게는 관계를 복원, 개선시키고 6자회담 관련국 가운데 민족적 관점에서 대북관계를 주도적 역할을 해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부는 표면적으로 격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12~13일 남북당국 회담 개최가 무산되며 결과적으로 스스로 걸림돌을 만들었다. 

여권은 이번 남북당국회담에서 의제와는 별개로 우리 측 최대 관심사인 '북핵 문제'를 거론하겠다고 별러왔다.

당국회담 의제에서 비핵화 문제가 빠져 있자 청와대 강경론자 사이에선 회담의 무의미성을 거론하는 분위기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아쉽게 나오는 마당에 비핵화 문제가 빠진 회담에 우리로선 서둘러야할 이유가 없다는 분위기다.

박 대통령은 한반도 프로세스를 위해서는 양보나 끌려가는 것은 불필요하다는 원칙을 앞세우고 있다.

내친 김에 이번 기회에 남북관계를 우리 정부가 주도해나가는 기회로 삼겠다는 의도에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11일 "북한은 우리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모처럼 형성된 남북관계 개선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남북이 격의 틀에 매여 컨텐츠를 채우는데 소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박 대통령이 2002년 5월당시 방북이 좋은 예다.

2002년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5월10일) 북한을 방문하기 위해 유럽-코리아재단 장자크 크로아 이사장과 지동훈, 신희석 이사와 함께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했다.

박 대통령은 북한 민족화해협의회 초청에 따라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중국 베이징(北京)을 거쳐 11일 입북한 뒤 3박 4일의 일정을 마치고 14일 판문점을 통해 귀국했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은 11일 중국에서 고려항공편을 이용해 평양방문을 추진하던 박 대통령 일행에게 자신의 특별전용기를 보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은 당시 의원신분에 불과했지만 2000년 6.15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묵은 백화원 초대소에서 여장을 풀었다.

당시 박 대통령의 동선에는 김용순 노동당 비서 등 최고 권력실세들이 함께했고 평양소년궁전 방문시에는 1,000명의 어린이가 특별대공연을 펼쳤다.

조선중앙통신은 박 대통령을 '국회의원이며 한국미래연합창당준비위원장, 여사"등 극존칭을 사용하며 14일 자정시간에는 김정일 위원장과 단독회동까지 했다.

그야말로 국빈을 방불케 했다.
격을 얘기한다면 당시로서는 노무현 정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북한으로서는 야당대표도 아닌 박 대통령을 극진하게 대우하며 경색된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노 전 대통령은 박 대통령을 참여정부 초대 통일부장관으로 영입을 시도했던 정황들이 정치권에 파다했던 것도 이런 점과 연결된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과 박 대통령은 격으로만 따진다면 만남 자체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김 전 위원장과의 회동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 재확인, 금강산 면회소 설치, 국군포로 생사 확인, 남북축구대회 개최 등 남북 숙원사업을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북측에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은 한국 행정부의 장관급보다 높은 위치로 알려져 있다. 통전부장이지만 한국 행정부의 부처 장과 동일하게 볼 수 없다는 게 북한측 인식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의 방북 당시보다 김양건 통전부장은 북한 내 위상 뿐 아니라 비중도에서 부총리급으로 알려져있는 반면 우리 정부의 통일부 장관은 부총리 겸 통일원장관이던 것이 노무현 정부 때 정부조직개편으로 장관으로 낮아져 있는 상태다.

남북관계의 가늠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남북당국회담의 성패 여부에 따라 남북관계는 '악화'냐 '개선'이냐의 갈림길에 설 것으로 전망된다.

다행히 정부는 12일 대화의 문은 열어놓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북한 역시 대표단 파견 철회가 아닌 유보라는 여지를 다소나마 남겨뒀다.

그러나 남북 양측은 기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있어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양보라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김대중 정부때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트위터에서 "기싸움? 어렸을 때 많이 해 봤습니다. 남북간에 또 기싸움? 우리는 수정제의 안 하고 북한은 통신선 끊고 미 일 중의 움직임을 보더라도 남북대화는 이루어집니다.양보하면 남북이 기싸움에 공동승리합니다"라고 조언했다.